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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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명성황후

     

     

    조선, 대한제국 고종의 정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모친.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 김씨와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하자. 을미사변으로 사망한 후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추존되어 명성황후라 불리게 되었고 생전에는 중전 민씨, 왕후 민씨로 칭했다.

    1895년 일본인들에게 살해된 사실로 유명하며 현대의 한국 대중들에게 인지도가 가장 높은 조선 왕비다. 여흥 민씨들의 부정부패를 뒷받침했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를 끌어들였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일본이 내세운 친일 내각이 갑오개혁을 실시하자 러시아를 끌어들여 축출시켰다. 이로 인해 앙심을 품은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반일 감정 때문인지 명성황후를 옹호하려는 경향은 대중적인 것으로 특히 여흥 민씨들은 21세기인 현재에도 민비를 위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명성황후를 옹호하는 이들은 민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일제의 식민사관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당시 교과과정의 역사교육은 물론 일본 내에서는 명성황후를 악녀로 묘사하고 비난하는 소설 등이 출간되고 국내로도 반입된다. 반대로 일본이 지원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은 호평하고 이를 주도했던 급진 개화파 인물들은 과도하게 띄웠다. 이때 형성된 사관과 민중 의식은 오랫동안 지속되다 당시 상황과 인물들의 평가를 기록한 각국 공사관 문서가 공개되고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 인물들의 부정적인 면모도 알려지면서 중화된 편이다.

     

    명성황후


    명성황후를 옹호하는 주장에 따르면 을미사변을 주도한 미우라 고로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후 일본의 20년 화근을 제거했다고 기뻐한 것을 들며 명성황후가 조선이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다 의로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평하고 있다. 또 프랑스 르땅지의 극동 특파원 빌따르 드 라게리는 오직 명성황후만이 조선을 이끌 수 있었던 정치가였다고 기술하면서 명성황후가 죽음을 당하자 조선은 맥없이 무너졌다는 평가를 한 것, 미국 외교관 출신인 윌리엄 플랭클린 샌즈가 명성황후를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라고 평가한 것도 인용하고 있다.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는 흥선대원군 세력과 급진 개화파에게 매우 비난의 대상이었고 당대의 민중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매천야록에 이러한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다. 이는 흥선대원군 하야 이후 개화를 받아들여 수입품이 쏟아져 국산품을 밀어내고 당백전과 당오전의 발행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닥쳐 생활고를 겪었던 상황을 민중들이 왕비가 국고를 탕진했다고 믿었던 탓이다. 다만 민겸호, 민영휘 같은 부패한 민씨 척족들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학자, 강사, 교사들의 명성황후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공무원 한국사나 수능 한국사 등 역사교육계에서는 상당수 강사들이 명성황후를 비판하고 있다.

    이런 일이 쌓여서 결국 터진게 임오군란으로 이로 인해 외국 군대가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정신을 못 차리고 일본군이 파병하도록 만들어 결국 자기 목숨까지 잃게 만든 것을 생각해보면 호평하는 부분도 높게 평가할 이유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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